브리튼의 두번째 방문객 - 켈트족

 이베리아인 이후 브리튼 섬으로 이주해온 민족이 켈트족이다. 참고로 켈트족은 고대 로마시대엔 갈리아인(프랑스 갈리아 지역의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불리었다. 그렇다면 갈리아인이자 켈트족은 언제 브리튼 섬으로 이주한 것일까? 대략적으로 기원전 6 - 4세기에 프랑스의 갈리아 지역과 영국의 브리타니아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켈트족의 특징은 라텐문화, 즉 유럽철기시대의 문화를 낳은 민족으로 호전적이며 목축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이들이었다. 
 
 켈트인들은 브리튼 내에 구릉지대에 성채를 구축하였고, 기원전 2세기엔 켈트 고유의 섬 국가 문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돼지고기를 먹고 맥주를 마시는 것과 드루이디즘 의식의 발달, 켈트족 특유의 토조 성채를 쌓는 등의 기술이다. 심지어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의 내용을 보게되면 고대 시대인 이때부터 브리튼인의 왕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즉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역사에도 기록될 정도의 강한 부족들이 등장했지만,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는 켈트족의 한계였다. 강한 부족국가가 있더라도 통일된 국가가 없다는 것은 결국 산발적인 세력이란 뜻이다. 중앙 집권적인 로마 앞에선 켈트인들은 너무나도 약했다. 이 내용은 로만 브리튼에서 좀더 다루겠다.
 
 그렇다면 기존에 브리튼에 살고 있던 이베리아인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켈트인들이 이주하기 전에 다 죽은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아리안의 한 분파인 켈트족이 브리튼에 이주하면서 기존에 터를 잡고 있던 이베리아인들을 학살하거나 산지로 몰아 버리거나 동화를 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브리타니아를 켈트족의 문화권으로 장악한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기에 이베리아인들이 거의 말살 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브리튼의 최초인은 분명 이베리아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를 만들고 남긴 것은 켈트족이다. 그렇기에 브리튼의 최초의 문화적 원주민은 켈트족이라고 할 수 있다. 
 

 브리튼 내의 켈트족 구성

 켈트족은 아일랜드의 게일인과 스코트랜드 쪽의 픽트족과 로만 브리튼, 브리튼인으로 나뉘게 된다. 특별히 픽트족은 끝가지 로마 침공에 대항하여 싸웠던 이들이었다. 이와 반대로 브리튼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인 이들로 로마제국에 동화되어 생김새만 켈트족일뿐 생활습관과 생각은 로마인 그 자체가 된 이들이었다. 또한 브리튼인 중에는 로마인들과 결혼하여 혼혈을 낳기도 했다. 물론 이 내용은 로만 브리튼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픽트족과 브리튼인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기점을 이북은 픽트족, 이남은 브리트인의 거주 구역이었다.
 
 그러나 서로마의 멸망 후 픽트족이 브리튼 인들을 학살했다. 이때 공격당하던 브리튼인들이 앵글로색슨족의 용병을 고용했다. 그런데 앵글로색슨족이 배신하여 브리튼인들을 도륙하고 산악지역으로 몰아낸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앵글로색슨족으로 부터 브리튼인들을 구원해줄 구원자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아서 왕이다. 아마도 잠시나마 앵글로색스족의 침공을 막아냈던 지도자를 미화해서 전설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때 도망친 브리튼인들이 후에 웨일스인이 된다. 
 

결론

 오늘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의 현재까지 남아 있는 혈통 중 가장 오래된 혈통이 바로 켈트족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켈트족의 역사는 영국 역사의 중세시대까지 다루어야 한다. 그래야 앵글로색슨족이 중심이되는 7왕국 시대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오늘은 브리튼으로 넘어온 켈트족이 어떤 이들이었고 무엇을 했는지 간단히 살펴보았다. 다음엔 로만 브리튼의 시대에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의 침공 후 7왕국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최초로 브리튼에 정착한 민족 - 이베리아인

 
 브리튼도 선사시대 이전부터 그 이래 인간의 활동이 이어져 오고 있다. 특별이 브리튼은 섬이지만, 드넓은 평야와 온화한 기후로 인해 침략자들에게 수차례 침략 당해왔다. 그중 최초로 브리튼으로 이주한 인종은 이베리아인으로 보고 있다. 그들을 바로 브리튼의 최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최초인이란 브리튼에서 살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최초로 이주해온 인종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브리튼의 역사는 그야말로 외부 정복의 향연이다. 오늘 살펴볼 것은 이베리아인이지만 이후 켈트인, 로마인, 색슨과 앵글족, 그리고 바이킹의 침략, 그후엔 노르만인들이 최종적으로 브리튼을 정복해 오늘 날의 영국이란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아베리아인은 이젠 유적으로만 그 자취를 추측하지만, 켈트, 로마, 색슨, 노르드, 프랜치 노르만들은 서로를 죽이거나 추방하거나 융합되면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가 되었다. 브리튼은 독특한 곳이다. 앞으로 브리튼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보려고 한다.
 
 그 중 오늘은 브리튼의 최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베리아인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베리아인

 이베리아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선사시대부터 고대까지 스페인과 포르투칼 지역에 있는 이베리아 반도 동남부 해안가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베리아인이라는 용어를 넓게 사용한다면 당시 이베리아 반도 살고 있던 켈트족, 켈티베리아인, 바스코네스족, 루시타니아인, 투르데타니아인 등 여러 민족들을 포함하는 의미로도 사용이 가능하나, 보통은 이베리아 반도 동남부의 주민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베리아인 들이 살던 지역이 워낙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보니 이베리아인들의 생활양식과 경제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베리아인을 말할 때, 문화나 민족 구성, 국가 구성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이베리아인은  로마 제국 이전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문화로 규정할 뿐이다. 이들은 거주지와 일부 특징을 제외하면 다른 면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즉 단일 민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베리아 인들의 유래에 대해 2가지 학설만 있을 뿐 정확하지 않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신석시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로 유입되었다는 것 뿐이다. 즉 오늘 날 이베리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민족도 국가도 아닌 단지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살았던 인종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중 몇몇은 이베리아 반도를 떠났고 일부가 브리튼으로 이주했다고 추측이 된다. 그렇다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았던 이베리아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카르타고와 로마의 공격을 받았고 기원전 1100년 이베리아반도는 페니키아인들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아마도 이 때 이베리아 인들 다수가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생계 수단

 이베리아인은 주로 농업과 사냥, 채집 등의 방식으로 생활 했다. 선사시대 초기에는 주로 사냥과 수집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업과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청동과 농경기술을 위한 철 등 금속을 다룰 줄 알았다. 청동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베리아인 내부에서 계층의 분할이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이베리아인들은 주변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등과 무역을 하면서 구리와 주석 등을 수출했다. 즉 이베리아인들은 발전된 문명을 가진 집단이었다. 농업 혁명과 철기를 다룰 줄 알정도 발전되어 있던 것이다. 
 

 브리튼으로 이주

 이제 오늘은 본론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오늘 글의 핵심은 이베리아인들이 브리튼의 최초인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브리튼 섬에서 유명한 민족은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러고 하는 이베리아인은 켈트족이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 브리튼에 정착한 인종이었다. 그렇다면 이베리아인들은 어떻게 브리튼으로 오게 된 것일까?
 
 지금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바다가 존재한다. 그래서 영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려면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는 것이 당연하다.(해저터널이 있지만) 그러나 이베리아인들은 브리튼 까지 배를 타고 항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엔 도보로 브리튼까지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이베리아인들이 브리튼으로 이동할 때는 빙하기였다. 즉 해수면이 낮아져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 등의 유럽대륙과 영국이 육지로 연결이 되어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그들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이나 노르망디, 브르타뉴 지방에서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까지 걸어서 이동했을 것이다. 여기에 브리튼이 거리상으로도 아주 멀리 떨어진 섬이 아닌 유럽 대륙과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이동하는 것에 있어 더욱 쉬웠을 것이다. 이베리아인들이 브리튼으로 이주를 하고 난 후 시간이 흘러 빙하기 녹는 해빙기가 되면서 해수면이 점점 높아졌고 브리튼은 유럽대륙으로부터 분리되어 섬으로 고립되었고 자연스럽게 대륙에서 건너온 이베리아인들이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켈트 신화를 보게 되면 켈트 이전에 아일랜드 종족들은 이베리아인이 모티브일 것으로 추측한다. 
 

결론

 사실 이베리아인이 정말 브리튼으로 이주했느지는 확실치 않다. 역사적인 증거는 여전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톰 부스 박사와 마크 토머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교수는 과학 잡지 '자연 생태계와 진화'에 게재된 논문을 통해 영국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해의 DNA와 이베리아 농민의 DNA 사이에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이베리아인과 영국 신석기 시대 농민이 같은 뿌리를 가졌다는 것을 뒷 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농민들이 아마도 영국의 스톤헨지 등의 거석을 세우는 기념물 전통도 전수 했다고 추측했다.
 
 이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영국의 신석시 시대에 이베리아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이 영구의 신석기 유물들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영국의 유명한 신석기 시대 유물은 스톤헨지 등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이베리아인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

 

 아카드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셈족인 아카드인(Akkadians)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전의 수메르 문명에서는 여러 도시국가가 존재했으며, 이들 간의 전쟁과 경쟁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드인들은 다른 도시국가를 정복하며 제국을 세웠다. 이러한 정복 전쟁에서 사용된 전술적인 차별성은 높은 전략적인 역량을 보여주며, 이것이 아카드 제국의 건국과 이후의 전성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은 지난 포스팅에 이어서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대왕의 사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보겠다.

아카드 제국2

아카드 제국의 혼란기

 아카드 제국의 혼란기는 초대 사르곤 왕의 사후와 리무쉬 왕, 그리고 그의 형이자 3대 왕이 된 마니쉬투슈의 통치기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키며, 약 150년간의 기간을 포괄한다.

 혼란기의 시작은 제국의 시작을 알린 사르곤 대왕의 말기부터 징조가 있었다. 제국 내에 기근과 흉작이 겹치며, 백성들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졌으며, 이미 수많은 반란이 벌어졌다. 물론 사르곤 대왕은 탁월한 군사력으로 모든 반란을 평정했다. 그렇기에 사르곤 대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의 카리스마로 인해 제국이 유지되었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 사르곤 왕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왕좌를 계승한 리무쉬 왕도 결국 자신의 왕위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사르곤 대왕은 뛰어난 군주였지만, 그의 자녀들 중엔 군재가 없었던 것이다. 아카드 제국의 2대 왕으로 즉위한 리무쉬 왕은 즉위와 동시에 반란들을 제앞하기 바빴다. 그도 아버지에게 본 것은 있었기에 반란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잔혹한 학살을 펼쳤다. 무려 리무쉬 왕이 즉위하면서 죽기까지 9년 동안 제국은 피바람이 불었다. 그간 많은 도시의 성벽과 신전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던 중 기원전 2270년 경 리무쉬 왕은 궁정에서 신하에게 돌로 된 인장으로 맞아 죽게 되었다. 리무쉬 왕이 죽고 난 후 아카드 제국의 왕좌는 사르곤 왕과 타쉬룸툼 왕비의 아들인 마니쉬투슈가 이어받게 된다.

 아카드 제국의 3대 왕이 된 마니쉬투슈도 자신의 동생과 동일한 입장에 놓인다. 수많은 반란이 마니쉬투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마니쉬투슈 왕도 리무쉬 왕과 동일하게 잔혹한 폭정으로 반란을 다스렸다. 그렇게 잠시 제국은 평화를 되찾는 것 처럼 보였다. 심지어 마니쉬투슈 왕은 국외 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리무쉬 왕 때 쇠퇴했던 무역도 다시금 부흥시켰다. 마니쉬투슈 왕의 아카드 제국은 티그리스 강을 통해 37개의 도시들과 무역을 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도 매만 질 줄 알던 왕이었다. 무너졌던 니네베의 이슈타르 신전을 복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혼란기가 점차 막을 내리고 왕권이 강해지는 것 같던 이시기 마니쉬투슈 왕은 기원전 2255년, 리무쉬 왕과 같이 궁정 신하에게 살해 당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나람신이 아카드 제국의 제4대 왕으로 등극한다.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

 제4대 왕인 나람신 왕이 다스린 시기는 기원전 2254년 - 기원전 2218년까지였다. 그리고 이 시기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대왕 때 누렸던 영광을 되찾게 된다. 사르곤의 손자인 나람신은 그의 할아버지의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은 지도자였다. 나람신 왕이 즉위했을 때에도 수많은 도시 국가들은 서로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람신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반란한 도시들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3명의 왕을 사로잡아 제국은 여전히 건제하다는 것을 제국 내외로 알렸다.

 나람신 왕은 아카드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나람신 때 아카드 제국은 역대 최강의 세력과 최대의 영토를 자랑했다. 나람신 왕 때 아카드는 지중해에서 아르메니아 지방까지 다 달았다. 또한 아카드에 가시와 같던 엘람의 군주들과도 평화 조약을 맺어 아카드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시켰다. 수사 지방엔 총독까지 파견하여 왕권과 제국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나람신 왕도 사르곤 왕과 같이 제국 곳곳에 자신의 모습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제국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무역에도 힘을 썼으며, 새로운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에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총독을 세웠다. 이로써 아카드 제국은 중앙 집권적 제국이 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자치적으로 내정을 처리할 수 있도록 행정기구들을 두기도 했다. 대신 제국의 통합을 위해 종교에 힘을 썼다.

 나람신 왕은 특히 종교를 왕권 강화에 잘 사용했는데, 그동안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선 왕을 신의 대리자로 여겼다. 그러나 나람신 왕은 자신을 이 세상에 강림한 신 자체라고 주장했다. 왕권과 신권을 함께 강화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제 계급을 우대하고 그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나람신의 이러한 노력은 아카드 제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나람신 왕은 사계왕이란 칭호로 불렸다. 기존의 메소포타미아와 정복으로 인해 얻은 자그로스 산맥, 아르메니아. 동 아라비아까지 다스린 왕이란 뜻이다.

 

 

 아카드 제국의 멸망

 그러나 나람신 왕 사후, 아카드 제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특히 자그로스 산맥 인근에 기원을 둔 유목민족 구티족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미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대왕 때부터 구티족을 경계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르곤 대왕 때는 격퇴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사실 나람신 왕 때까지만 해도 구티족은 아카드를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람신 왕 사후 점차 세력이 약해져 가는 아카드 제국을 바라보며 구티족이 제국을 침략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구티족이 아카드를 괴롭힌 이유는 구티족은 유목민족이다 보니 농경 사회에 대한 이해강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침략하여 정복한 도시를 구티족은 뒤도 안 돌아보고 불태운 것이다. 심지어 가축화한 동물들은 풀어주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카드 제국의 경제가 구티족이 침략할 때마다 무너져 내렸다. 

 아카드의 제5대 왕으로 등극한 샤르칼리샤리는 아카드 제국이 파탄난 상황을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티족과 싸우기 위해선 세금이 필요했고 세금을 인상하려 하자 도시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기근과 흉작까지 겹치니 아카드 제국은 멸망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샤르칼리샤리 왕 때 아카드는 북쪽의 구티족의 침입과 서쪽의 아모리족의 공격, 내부에서는 우르크를 중심으로한 수메르인들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그러다 샤르칼리샤리 왕이 죽게 된다. 그렇게 아카드 제국은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된다. 왕의 사후 이기기, 이미, 나눔, 일루루 네 명이 동시에 왕위를 주장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멸망의 가도를 달리는 제국에게 제트 엔진을 달아준 셈이다. 결국에는 사르곤 왕조의 혈통인 두두라는 인물이 내홍을 종식시키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제국은 망국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었다. 아카드의 제6대 왕으로 등극한 두두 왕은 내부적으론 봉신 국가였던 움마나 엘람의 도시 국가들과도 싸워야 했고 구티족과도 맞서야 했다. 두두 왕 때 아카드는 더 이상 제국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이미 영토는 수도인 아카드를 제외하곤 없었기 때문이다.

 두두 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슈툴루가 왕으로 등극했다. 이 슈툴루 왕이 아카드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죽기 살기로 아카드 제국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다행인 것은 슈툴루 왕은 사르곤 왕의 핏줄이 맞았다. 군사적으로 재능이 있던 것이다. 그는 키시와 투툽, 에슈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르크를 다시금 아카드 제국 영역 안으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런 슈툴루 왕도 북쪽의 구티족은 버거웠다. 구티족은 유목민족의 특징인 막강한 기동성을 이용해서 수도인 아카드를 함락시켰다. 이때 아카드의 7대 왕인 슈툴루 왕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사르곤 대왕으로 시작된 인류 최초의 제국 아카드는 구티족의 침략으로 18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살아졌다. 

 

결론

 역사상 최초의 제국으로 평가받는 아카드는 18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구티족의 침략으로 살아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 사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르곤  대왕을 필두로 강력한 군사력으로 탄생한 국가 '아카드'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아카드 제국도 결국 다른 강력한 무력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역사상에서 살아진 제국에 대해서 우리는 21세기에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바로 기록 때문이다. 아카드는 수메르인들이 사용하던 쐐기 문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 덕분에 우린 과거의 일인 아카드라는 제국에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강력한 무력도 풍족한 제국도 영원할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살아진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글인 기록은 보존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우리가 그 시대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역사는 글의 위대함과 글자의 위대함을 더더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사료를 기준으로 알아갈 문명과 나라들이 더욱 기대되는 시간이다. 

 언젠가 나도 죽고 없어지겠지만, 나의 글은 남을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우면서도 무언가 놀라우며 신기하다.

 

 

들어가는 말

 제국이란 하나 이상의 지역 또는 국가를 통합하고, 일관된 법과 규칙, 문화, 경제, 군사력 등을 강화하여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제국은 일반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력한 국가에서 형성되며, 제국의 목표는 종종 다양한 지역과 문화를 지배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제국은 종종 전제주의적인 경향을 띄며,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에 따라, 제국은 종종 군사력과 경제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통치자들은 강력한 통치체제와 행정력, 군대와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강화한다.

 오늘 우리가 알아보려 하는 아카드 제국도 당시 여러 도시 국가의 연합이었던 수메르인들의 도시를 점령한 셈족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셈족, 아카드인은 어떻게 제국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아카드 제국

 

 아카드 제국의 시작 - 사르곤 대왕

 아카드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처음으로 통일한 국가이자, 인류 최초의 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아카드는 사르곤 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르곤 이전의 기록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아카드는 사르곤 대왕 이후부터이다. 아카드 제국의 시작은 기원전 2334년으로, 이때 사르곤 대왕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다양한 도시국가를 통일하여 아카드 제국을 건국하였다. 즉 아카드로 인해 초기 왕조 시대가 끝이 난 것이다.

 사실 아카드 자체에 대해서는 사르곤 대왕이 수메르를 정복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알려져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사르곤 대왕은 본디 키시(Kish)의 왕이었던 우르자바바 아래서 고위 관료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히는 그의 아래에서 '정원사'를 했다고 남아 있지만, 아마도 도시의 수로를 관리하는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르곤은 제국의 초석이 되는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력이 불어난 사르곤은 키시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한 후 움마의 왕 루갈작게시가 통합한 수메르의 도시 국가들을 하나씩 함락시켜 종국에는 수메르의 수도였던 우루크마저 정복하며, 아카드 제국의 시작을 알린다. 그렇게 아카드인들의 말인 아카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이때부터 수메르 인들의 문자인 쐐기 문자를 활용하여 아카드어를 기록한다.

 사르곤은 수메르 지역을 통합한 이후 계속해서 지중해 연안과 엘람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불태운다. 그리고 그 지역들을 정복한 이후엔 비문을 세워 아카드어를 기록했다.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합하는 것을 넘어 현재 튀르키에의 영통인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아카드의 군사력

 

 사르곤은 어떻게 이렇게 강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카드인들이 수메르인들보다 앞선 무기의 기술 개발에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청동기 무기와 4마리의 말과 4개의 통나무 바퀴가 달린 전차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육중하고 느리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셈족의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인의 전차의 이러한 단점을 보안하고자 고민했었다. 그 결과 아카드인들은 4개가 아닌 2개의 바퀴를 사용했고 바퀴도 통나무가 아닌 수레바퀴를 개발하여 더 가볍고 빠른 전차를 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카드인의 전차는 다양한 지역에서도 사용이 가능했고, 심지어 보병보다 더 빠르게 이동이 가능했으며, 창병과 궁수 각각이 탑승하여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아카드인은 복합궁을 개발하여 원거리에서도 사용 가능한 활을 만들었고 심지어 파괴력도 수메르인들의 청동 갑옷을 뚫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동력과 원거리에서 차이를 보이게 되어 전장을 휩쓸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사르곤은 이런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수립함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여 대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르곤은 수도에 이슈타르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고 정복한 나라의 기존의 왕과 사제인 루갈과 엔시는 그대로 두었다. 그러면서 사르곤 자신은 위대한 아누 신의 사제라고 했다.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대왕 이후로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아카드 제국의 언어인 아카드어는 수천 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아카드 제국의 문화, 정치, 경제 등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겨준 것이다.

 아카드 제국은 수많은 군사적 성과를 거뒀다. 사르곤 대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아카드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제국이자, 인류 최초의 제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결론

 

 인류 최초의 문명은 수메르인들이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약 23세기 경 최초의 제국은 셈족 계열인 아카드인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사르곤 1세는 55년간 아카드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사르곤 말기 가혹한 통치와 기근 등으로 인해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르곤은 모든 반란은 무력으로 잠재울 수 있었다.

 아카드 제국은 무력이 가장 중요했던 국가이다. 사르곤이라는 철저한 카리스마 리더에 의해 국가가 시작되었고 유지되었으며, 제국의 기틀이 다져졌다. 다음으로는 아카드 제국의 혼란기와 전성기를 살펴볼 것이다. 앞으로 사르곤 1세가 세운 아카드 제국의 여러 면을 함께 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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