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아카드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셈족인 아카드인(Akkadians)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전의 수메르 문명에서는 여러 도시국가가 존재했으며, 이들 간의 전쟁과 경쟁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드인들은 다른 도시국가를 정복하며 제국을 세웠다. 이러한 정복 전쟁에서 사용된 전술적인 차별성은 높은 전략적인 역량을 보여주며, 이것이 아카드 제국의 건국과 이후의 전성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은 지난 포스팅에 이어서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대왕의 사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보겠다.

아카드 제국2

아카드 제국의 혼란기

 아카드 제국의 혼란기는 초대 사르곤 왕의 사후와 리무쉬 왕, 그리고 그의 형이자 3대 왕이 된 마니쉬투슈의 통치기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키며, 약 150년간의 기간을 포괄한다.

 혼란기의 시작은 제국의 시작을 알린 사르곤 대왕의 말기부터 징조가 있었다. 제국 내에 기근과 흉작이 겹치며, 백성들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졌으며, 이미 수많은 반란이 벌어졌다. 물론 사르곤 대왕은 탁월한 군사력으로 모든 반란을 평정했다. 그렇기에 사르곤 대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의 카리스마로 인해 제국이 유지되었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 사르곤 왕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왕좌를 계승한 리무쉬 왕도 결국 자신의 왕위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사르곤 대왕은 뛰어난 군주였지만, 그의 자녀들 중엔 군재가 없었던 것이다. 아카드 제국의 2대 왕으로 즉위한 리무쉬 왕은 즉위와 동시에 반란들을 제앞하기 바빴다. 그도 아버지에게 본 것은 있었기에 반란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잔혹한 학살을 펼쳤다. 무려 리무쉬 왕이 즉위하면서 죽기까지 9년 동안 제국은 피바람이 불었다. 그간 많은 도시의 성벽과 신전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던 중 기원전 2270년 경 리무쉬 왕은 궁정에서 신하에게 돌로 된 인장으로 맞아 죽게 되었다. 리무쉬 왕이 죽고 난 후 아카드 제국의 왕좌는 사르곤 왕과 타쉬룸툼 왕비의 아들인 마니쉬투슈가 이어받게 된다.

 아카드 제국의 3대 왕이 된 마니쉬투슈도 자신의 동생과 동일한 입장에 놓인다. 수많은 반란이 마니쉬투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마니쉬투슈 왕도 리무쉬 왕과 동일하게 잔혹한 폭정으로 반란을 다스렸다. 그렇게 잠시 제국은 평화를 되찾는 것 처럼 보였다. 심지어 마니쉬투슈 왕은 국외 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리무쉬 왕 때 쇠퇴했던 무역도 다시금 부흥시켰다. 마니쉬투슈 왕의 아카드 제국은 티그리스 강을 통해 37개의 도시들과 무역을 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도 매만 질 줄 알던 왕이었다. 무너졌던 니네베의 이슈타르 신전을 복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혼란기가 점차 막을 내리고 왕권이 강해지는 것 같던 이시기 마니쉬투슈 왕은 기원전 2255년, 리무쉬 왕과 같이 궁정 신하에게 살해 당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나람신이 아카드 제국의 제4대 왕으로 등극한다.

 

 아카드 제국의 전성기

 제4대 왕인 나람신 왕이 다스린 시기는 기원전 2254년 - 기원전 2218년까지였다. 그리고 이 시기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대왕 때 누렸던 영광을 되찾게 된다. 사르곤의 손자인 나람신은 그의 할아버지의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은 지도자였다. 나람신 왕이 즉위했을 때에도 수많은 도시 국가들은 서로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람신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반란한 도시들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3명의 왕을 사로잡아 제국은 여전히 건제하다는 것을 제국 내외로 알렸다.

 나람신 왕은 아카드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나람신 때 아카드 제국은 역대 최강의 세력과 최대의 영토를 자랑했다. 나람신 왕 때 아카드는 지중해에서 아르메니아 지방까지 다 달았다. 또한 아카드에 가시와 같던 엘람의 군주들과도 평화 조약을 맺어 아카드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시켰다. 수사 지방엔 총독까지 파견하여 왕권과 제국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나람신 왕도 사르곤 왕과 같이 제국 곳곳에 자신의 모습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제국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무역에도 힘을 썼으며, 새로운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에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총독을 세웠다. 이로써 아카드 제국은 중앙 집권적 제국이 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자치적으로 내정을 처리할 수 있도록 행정기구들을 두기도 했다. 대신 제국의 통합을 위해 종교에 힘을 썼다.

 나람신 왕은 특히 종교를 왕권 강화에 잘 사용했는데, 그동안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선 왕을 신의 대리자로 여겼다. 그러나 나람신 왕은 자신을 이 세상에 강림한 신 자체라고 주장했다. 왕권과 신권을 함께 강화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제 계급을 우대하고 그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나람신의 이러한 노력은 아카드 제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나람신 왕은 사계왕이란 칭호로 불렸다. 기존의 메소포타미아와 정복으로 인해 얻은 자그로스 산맥, 아르메니아. 동 아라비아까지 다스린 왕이란 뜻이다.

 

 

 아카드 제국의 멸망

 그러나 나람신 왕 사후, 아카드 제국은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특히 자그로스 산맥 인근에 기원을 둔 유목민족 구티족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미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대왕 때부터 구티족을 경계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르곤 대왕 때는 격퇴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사실 나람신 왕 때까지만 해도 구티족은 아카드를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람신 왕 사후 점차 세력이 약해져 가는 아카드 제국을 바라보며 구티족이 제국을 침략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구티족이 아카드를 괴롭힌 이유는 구티족은 유목민족이다 보니 농경 사회에 대한 이해강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침략하여 정복한 도시를 구티족은 뒤도 안 돌아보고 불태운 것이다. 심지어 가축화한 동물들은 풀어주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카드 제국의 경제가 구티족이 침략할 때마다 무너져 내렸다. 

 아카드의 제5대 왕으로 등극한 샤르칼리샤리는 아카드 제국이 파탄난 상황을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티족과 싸우기 위해선 세금이 필요했고 세금을 인상하려 하자 도시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기근과 흉작까지 겹치니 아카드 제국은 멸망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샤르칼리샤리 왕 때 아카드는 북쪽의 구티족의 침입과 서쪽의 아모리족의 공격, 내부에서는 우르크를 중심으로한 수메르인들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그러다 샤르칼리샤리 왕이 죽게 된다. 그렇게 아카드 제국은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된다. 왕의 사후 이기기, 이미, 나눔, 일루루 네 명이 동시에 왕위를 주장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멸망의 가도를 달리는 제국에게 제트 엔진을 달아준 셈이다. 결국에는 사르곤 왕조의 혈통인 두두라는 인물이 내홍을 종식시키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제국은 망국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었다. 아카드의 제6대 왕으로 등극한 두두 왕은 내부적으론 봉신 국가였던 움마나 엘람의 도시 국가들과도 싸워야 했고 구티족과도 맞서야 했다. 두두 왕 때 아카드는 더 이상 제국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이미 영토는 수도인 아카드를 제외하곤 없었기 때문이다.

 두두 왕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슈툴루가 왕으로 등극했다. 이 슈툴루 왕이 아카드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죽기 살기로 아카드 제국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다행인 것은 슈툴루 왕은 사르곤 왕의 핏줄이 맞았다. 군사적으로 재능이 있던 것이다. 그는 키시와 투툽, 에슈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르크를 다시금 아카드 제국 영역 안으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런 슈툴루 왕도 북쪽의 구티족은 버거웠다. 구티족은 유목민족의 특징인 막강한 기동성을 이용해서 수도인 아카드를 함락시켰다. 이때 아카드의 7대 왕인 슈툴루 왕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사르곤 대왕으로 시작된 인류 최초의 제국 아카드는 구티족의 침략으로 180여 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살아졌다. 

 

결론

 역사상 최초의 제국으로 평가받는 아카드는 18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구티족의 침략으로 살아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 사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르곤  대왕을 필두로 강력한 군사력으로 탄생한 국가 '아카드'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아카드 제국도 결국 다른 강력한 무력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역사상에서 살아진 제국에 대해서 우리는 21세기에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바로 기록 때문이다. 아카드는 수메르인들이 사용하던 쐐기 문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 덕분에 우린 과거의 일인 아카드라는 제국에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강력한 무력도 풍족한 제국도 영원할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살아진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글인 기록은 보존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우리가 그 시대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역사는 글의 위대함과 글자의 위대함을 더더 깨닫게 해주는 것 같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사료를 기준으로 알아갈 문명과 나라들이 더욱 기대되는 시간이다. 

 언젠가 나도 죽고 없어지겠지만, 나의 글은 남을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우면서도 무언가 놀라우며 신기하다.

 

 

들어가는 말

 제국이란 하나 이상의 지역 또는 국가를 통합하고, 일관된 법과 규칙, 문화, 경제, 군사력 등을 강화하여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제국은 일반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력한 국가에서 형성되며, 제국의 목표는 종종 다양한 지역과 문화를 지배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제국은 종종 전제주의적인 경향을 띄며,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에 따라, 제국은 종종 군사력과 경제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통치자들은 강력한 통치체제와 행정력, 군대와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강화한다.

 오늘 우리가 알아보려 하는 아카드 제국도 당시 여러 도시 국가의 연합이었던 수메르인들의 도시를 점령한 셈족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셈족, 아카드인은 어떻게 제국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아카드 제국

 

 아카드 제국의 시작 - 사르곤 대왕

 아카드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처음으로 통일한 국가이자, 인류 최초의 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아카드는 사르곤 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르곤 이전의 기록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아카드는 사르곤 대왕 이후부터이다. 아카드 제국의 시작은 기원전 2334년으로, 이때 사르곤 대왕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다양한 도시국가를 통일하여 아카드 제국을 건국하였다. 즉 아카드로 인해 초기 왕조 시대가 끝이 난 것이다.

 사실 아카드 자체에 대해서는 사르곤 대왕이 수메르를 정복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알려져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사르곤 대왕은 본디 키시(Kish)의 왕이었던 우르자바바 아래서 고위 관료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히는 그의 아래에서 '정원사'를 했다고 남아 있지만, 아마도 도시의 수로를 관리하는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르곤은 제국의 초석이 되는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력이 불어난 사르곤은 키시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한 후 움마의 왕 루갈작게시가 통합한 수메르의 도시 국가들을 하나씩 함락시켜 종국에는 수메르의 수도였던 우루크마저 정복하며, 아카드 제국의 시작을 알린다. 그렇게 아카드인들의 말인 아카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이때부터 수메르 인들의 문자인 쐐기 문자를 활용하여 아카드어를 기록한다.

 사르곤은 수메르 지역을 통합한 이후 계속해서 지중해 연안과 엘람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불태운다. 그리고 그 지역들을 정복한 이후엔 비문을 세워 아카드어를 기록했다.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합하는 것을 넘어 현재 튀르키에의 영통인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아카드의 군사력

 

 사르곤은 어떻게 이렇게 강대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카드인들이 수메르인들보다 앞선 무기의 기술 개발에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청동기 무기와 4마리의 말과 4개의 통나무 바퀴가 달린 전차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육중하고 느리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셈족의 아카드인들은 수메르인의 전차의 이러한 단점을 보안하고자 고민했었다. 그 결과 아카드인들은 4개가 아닌 2개의 바퀴를 사용했고 바퀴도 통나무가 아닌 수레바퀴를 개발하여 더 가볍고 빠른 전차를 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아카드인의 전차는 다양한 지역에서도 사용이 가능했고, 심지어 보병보다 더 빠르게 이동이 가능했으며, 창병과 궁수 각각이 탑승하여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아카드인은 복합궁을 개발하여 원거리에서도 사용 가능한 활을 만들었고 심지어 파괴력도 수메르인들의 청동 갑옷을 뚫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동력과 원거리에서 차이를 보이게 되어 전장을 휩쓸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사르곤은 이런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수립함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여 대제국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르곤은 수도에 이슈타르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고 정복한 나라의 기존의 왕과 사제인 루갈과 엔시는 그대로 두었다. 그러면서 사르곤 자신은 위대한 아누 신의 사제라고 했다.

 

 아카드 제국은 사르곤 대왕 이후로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아카드 제국의 언어인 아카드어는 수천 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아카드 제국의 문화, 정치, 경제 등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겨준 것이다.

 아카드 제국은 수많은 군사적 성과를 거뒀다. 사르곤 대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도시 국가들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아카드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제국이자, 인류 최초의 제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결론

 

 인류 최초의 문명은 수메르인들이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약 23세기 경 최초의 제국은 셈족 계열인 아카드인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사르곤 1세는 55년간 아카드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사르곤 말기 가혹한 통치와 기근 등으로 인해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르곤은 모든 반란은 무력으로 잠재울 수 있었다.

 아카드 제국은 무력이 가장 중요했던 국가이다. 사르곤이라는 철저한 카리스마 리더에 의해 국가가 시작되었고 유지되었으며, 제국의 기틀이 다져졌다. 다음으로는 아카드 제국의 혼란기와 전성기를 살펴볼 것이다. 앞으로 사르곤 1세가 세운 아카드 제국의 여러 면을 함께 알아가 보자. 

 

들어가는 말

 많은 문명이 있지만, 수메르 문명은 여러 가지로 매력적이다. 일단 4대 근원지인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있으며, 초기 국가의 형태와 글자를 사용했다는 부분에서 인류 문명의 시작을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과거를 유추할 수단이 없는 고대시대는 유적을 토대로만 그 역사를 유추할 수 있지만, 유사 이래인 글이 존재하고 유적이 존재하는 시대는 좀 더 다각적으로 다양한 부분을 알 수 있기에 수메르 문명은 매력이 있다. 

 오늘은 수메르 문명 중, 젬데트 나스르와 초기 왕국 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수메르 문명

 

 젬데트 나스르 시대

 수메르 문명의 젬데트 나스르(Jemdet Nasr) 시기는 기원전 3100년에서 기원전 2900년 사이에 이루어진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는 수메르 문명에서 초기 단계에서 중간 단계로의 전환 기간으로 알려져 있다. 젬데트 나스르 기간은 우르크 시기의 끝과 원시 문맹(Protoliterate) 시기의 시작을 나타낸다.

 젬데트 나스르 시기의 이름은 이 시대 최초의 유물이 확인된 유적 '텔 젬데트 나스르'(지역명)에서 따왔다. 이 시기는 수메르 문명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때였다. 수메르 문명은 이 시기에 도시화와 교역, 작물 생산의 발전, 전문 노동자 계급의 출현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쓰기 시스템이 발전하여 새로운 기록 방식인 원형 문자와 웨지형 문자가 등장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수메르 문명은 기록을 남기고 전하는 방식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젬데트 나스르 시기에는 상업적, 경제적 교류가 발전하여 상업 거래와 교역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이전보다 더 조직적으로 변했다. 중앙정부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로 인해 분리되어 있던 도시 국가들이 긴밀해졌다.

 또한, 젬데트 나스르 시기는 유물의 생산과 제작 기술의 발전에서도 중요한 시기다. 수메르 문명의 예술품과 공예품은 이 시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후의 시대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다.

 

 초기 왕국 시대

 

 초기 왕국 시대란, 기원전 2900년부터 기원전 2350년까지 지속된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구분한 것이다. 약칭으로는 ED(Early Dynastic Period)라고도 한다. 초기 왕국 시대는 크게 ED I, ED II, ED IIIa, ED IIIb, 총 4시대로 구분된다. 

 

 수메르 문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이며, 기원전 5500년부터 기원전 4000년 사이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9세기경 초기 왕조 시대부터 역사적 기록들이 드물게 발견되기 시작한다.

 수메르 문명의 건설자들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고원 지대로 추정한다. 초기 수메르 문명에서는 여러 도시국가가 발생하였으며, 그 가운데 우르크가 가장 유명하다. 이후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힘을 합쳐 대왕국가를 형성하였고, 그 시기를 초기 왕조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초기 왕조 시대에는 수메르 문명의 대부분의 흔적이 사라져 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상세한 역사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전쟁이다. 바로 수메르인들이 키쉬의 왕 엔메바라게시의 지휘 하에 엘람인들을 물리쳤고, 그 무기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라는 기록이다.

 

 한편, 초기 우바이드기(기원전 5200년 ~ 4500년 또는 6090년 ~ 5429년)에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수메르어를 사용하는 문명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고고학적 기록이 있다. 따라서 초기 왕조 시대 이전에도 이미 수메르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초기 왕조 시대 이후에는 수메르 문명이 점차 발전하면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1 왕조,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King Gilgamesh)는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이야기는 수메르 문명의 문학작품인 에두나(Epic of Gilgamesh)에 담겨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는 수메르 문명이 중앙아시아의 이란 고원과 연관성이 있으며, 인구 이동과 상호작용이 수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수메르 문명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새로운 진전을 이루고 있다.

 

 초기 왕조 시대의 수도는 우르크(URUK)로 추정되며, 우르크 왕조는 수메르 문명 최초의 왕조로 알려져 있다. 초기 수메르 문명에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존재하며, 이들 도시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왔다. 초기 왕조 시대의 유명한 지도자로는 길가메시라는 인물이 있다.

 

 수메르 문명은 농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수메르인들은 유연한 관리 체계와 효율적인 노동 분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 결과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면서 도시 문명도 함께 발전해 나갔다. 초기 왕조 시대의 수메르 문명에서는 글씨와 숫자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농업 및 상업 분야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초기 왕조 시대에는 수메르 문명의 기본적인 문화적 특징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신들을 숭배하며, 다양한 종교적 의식을 지켜왔다. 그들은 또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이들 작품들은 수많은 창작물이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초기 수메르 문명은 시왕국 시대(기원전 29세기경 초기 왕조 시대)를 거쳐 점차적으로 발전하면서, 그 후 아카드 제국(기원전 24세기)에게 침략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결론

결론적으로초기 왕조 시대는 수메르 문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통해 수메르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발전하였으며, 기록의 발견으로 이 시기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초기 왕조 시대 이후의 수메르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초기 왕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연구는 수메르 문명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많은 발견과 연구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인간은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다. 이것은 엄청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의 기록과 만난다는 것은 훨씬 더 매력적이다. 과거를 통해 인류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들어가는 말

 

 

 수메르 문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문명 중 하나로, 기원전 4,500년 경부터 기원전 1,900년 경까지 현재 이라크 지역에 위치해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대략 수메르인이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에 수메르 지역에서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 문명은 기록의 발명과 도시문명의 발전, 농업의 혁신 등으로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대유행했던 우바이드기와 우르크기 시기는 그 발전의 정점을 이루었다.

 본 포스팅에서 수메르 문명 중 우바이드기와 우르크기 시기에 대한 역사와 문명, 문화 발명 등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바이드기와 우르크기

 

 우바이드기 시기(기원전 5,200년 경~기원전 4,500년 경)는 수메르 문명의 초기 시기로, 이때 도시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수메르 문명에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발생했는데, 이들 국가들은 국왕과 국내의 상인들이 주도하는 국가였다. 특별히 도시 국가들은 국왕의 칭호는 엔시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 중 강성한 도시 국가에서는 엔시보다 높은 루갈을 군주의 칭호로 사용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기록의 발명으로 알려져 있는 인감이나 원형 금속판 등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기록물의 보존을 가능케 하였으며, 문서들의 보존과 교환을 향상했다.

 또한 이 시기에 바퀴가 발명되었으며, 청동기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인다.

 

 

 우르크기 시기(기원전 4,500년 경~기원전 3,100년 경)는 수메르 문명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시기다. 이 시기에는 수메르 문명에서 다양한 문화 발명들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수학적인 개념으로는 60진법을 처음 도입하였고, 농업의 혁신으로는 배추, 양배추, 당근, 참외, 포도 등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여러 대규모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우르의 제단이며, 이제 막 시작된 종교적인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수메르 문명에서는 시키님(Shikin)의 문화가 대유행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교와 의식, 예술 등의 분야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수메르 시대의 종교는 동양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수메르 문명에서 발견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기원전 4000년경에 쓰인 우르크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노예 제도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많이 있으며, 우르크기의 문명은 주변에 있던 세력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주변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경제적 문화적으로 성장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그러나 무력면에서는 강한 군사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

 위와 같이, 수메르 문명의 우바이드기와 우르크기는 수많은 문화, 발명, 사상적 발전을 겪으면서 수메르 문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바이드기에서는 도시 규모와 규모가 큰 건물들의 건설, 정치체제의 변화 등이 일어나면서 독자적인 문명 발전을 이루었고, 이어지는 우르크기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융합되어 수메르 문명의 특색이 깊어지면서, 많은 발명과 기술,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중에서도,우르 3 왕조의 발전은 수메르 문명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외에도 수메르 문명에서는 수많은 문화와 발명이 일어나면서, 수학, 천문학, 글쓰기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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